[14] 음악을 바꾼 기계들: 스크래칭부터 샘플링까지, 턴테이블의 진화사
안녕하세요, 음악을 사랑하는 Vibe입니다.
턴테이블은 단순한 음악 재생기를 넘어 악기가 되었습니다. 스크래치에서 샘플링까지, DJ 문화의 기술과 창조의 진화를 탐험합니다.
소리를 듣던 DJ, 음악의 중심에 서다 – 사운드를 해체하고, 시간을 조각한 기계의 역사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한때 음악은 ‘들리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었지요. 곡의 구조를 바꾸거나, 시간을 거슬러 되감거나, 특정 소절만 반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저 흘러가고, 사라지는 감각.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바늘을 되돌렸습니다. 스크래치. 그 짧고 날카로운 소리는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시간을 되감는 첫 사운드였고, ‘청취자’가 ‘연주자’로 변신하는 첫 몸짓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턴테이블은 음악 재생기가 아닌 창조의 도구, 악기가 되었고,
DJ는 단순한 진행자가 아닌 시간의 조각가가 됩니다. 턴테이블은 그렇게, 사운드 해체의 역사이자 샘플링과 재창조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바늘 위의 혁명 – 스크래치의 탄생
1975년, 뉴욕. 그랜드 위자드 시어도어(Grand Wizzard Theodore)는 소음 같은 실수를 하며 역사의 문을 엽니다. 레코드를 플레이하다 무심코 바늘을 손으로 밀었고, 그 마찰에서 나오는 “지익” 소리가 이상하게도 음악적 리듬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그는 그 소리를 ‘의도적으로’ 반복했습니다. 그게 바로 스크래치의 탄생이었고, 이 기술은 턴테이블을 정지된 오디오 기계에서 역동적인 퍼커션 악기로 변모시켰습니다. 스크래치는 단순한 소리의 왜곡이 아니라, DJ가 감정과 리듬을 표현하는 손끝의 언어였습니다.
믹싱 – 두 사운드를 잇는 브리지
스크래치가 소리를 찢는 기술이었다면, 믹싱은 사운드를 연결하는 기술입니다. DJ들은 두 개의 턴테이블을 사용해 한 곡에서 다음 곡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타이밍을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곡을 트는 것이 아니라, 비트와 톤, 분위기를 분석하고 그 사이를 음악적으로 설계한 것입니다. 이 믹싱 기술은 오늘날 EDM, 하우스, 테크노 등 클럽 문화 기반 장르에서 필수적인 퍼포먼스가 되었으며, DJ 셋 하나가 하나의 라이브 공연으로 평가받는 계기를 마련했죠.
루핑과 브레이크비트 – 리듬의 재해석
초기 힙합 DJ인 쿨 허크(DJ Kool Herc)는 두 장의 동일한 레코드를 번갈아 사용해 브레이크 구간을 반복 재생했습니다. 이 기술은 곧 ‘브레이크비트’라 불리며 비보이 문화와 MC 배틀의 핵심 사운드로 자리잡습니다. DJ는 곡을 선택하고 트는 단계를 넘어 사운드 구조를 직접 재편하는 편곡자, 때론 작곡자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됩니다. ‘루핑(Looping)’은 그 연장선이었습니다. 반복을 통해 집중력과 트랜스적 몰입을 유도하고, 샘플링의 기반 기술로 확장되죠.
턴테이블 → 샘플러로: 사운드의 해체와 재구성
1980년대 후반, 턴테이블에서의 루핑과 믹싱 기술은 드디어 디지털로 이식됩니다. 아카이(MPC), 롤랜드(SP 시리즈), 이뮤(E-mu SP-1200) 같은 샘플러가 등장하면서 DJ는 레코드에서 잘라낸 사운드를 메모리에 저장하고, 자유롭게 트리거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중요한 건, 샘플링은 새로운 것을 복제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재구성한 창조의 방식이었다는 점입니다. 피아노 소절 하나, 드럼의 킥 한 번, 보컬의 “Yeah!”라는 단어조차 전혀 다른 문맥에서 새로운 곡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턴테이블리즘 – DJ의 악기 연주 선언
1990년대에는 턴테이블리즘(Turntablism)이라는 하위문화가 등장합니다. DJ들이 턴테이블을 퍼커션 악기처럼 연주하며 비트재킹, 비틀기, 피치 조정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창조합니다. 대표적 그룹으로는 인비저블 스크래치 피클즈 (Invisibl Skratch Piklz), X-Ecutioners, DJ Qbert, Kid Koala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턴테이블로 음악을 ‘연주’했고,
이는 비보이, 그래피티, MC와 함께 힙합의 네 번째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디지털의 등장 – 그리고 다시 아날로그로
2000년대, 디지털 DJ 장비가 대중화되면서 CDJ, MP3 기반 컨트롤러들이 전통적인 턴테이블을 대체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굳이 무거운 레코드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무한한 라이브러리 속에서 곡을 즉시 검색할 수 있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편리함은 턴테이블 고유의 감각을 그리워하게 만들었습니다. 2010년대 들어 바이닐(Vinyl) 리바이벌 현상이 일어나며, 많은 DJ들이 다시 아날로그 턴테이블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이는 단지 ‘복고’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사운드를 조작한다는 물리적 통제감을 향한 복귀입니다.
하나의 기계가 바꾼 질문들
턴테이블은 하나의 장비였지만, 그 위에서 던져진 질문은 거대했습니다. 음악은 반드시 작곡가만이 만들 수 있는가? 복제된 소리는 창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연주는 손가락으로만 하는가, 아니면 손바닥 전체로도 가능한가? 음악은 들리는 것인가, 만지는 것인가? 이 질문들은 단순히 DJ 문화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EDM, 힙합, 일렉트로닉, 아트팝까지 현대 음악 전반에 걸쳐 창작의 문법을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
턴테이블 위의 인간성
턴테이블의 진화는 기술이 음악을 집어삼키는 과정이 아니라, 기술이 음악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여정이었습니다. 스크래치는 실수에서 탄생한 소리였고, 샘플링은 과거의 파편을 모아 자기만의 서사를 짓는 기술이었습니다. 오늘날 누군가는 노트북으로, 누군가는 여전히 턴테이블로 음악을 조작하고 연주합니다. 하지만 그 모두의 기원에는 한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지직’ 소리가 있었습니다.
턴테이블은 음악을 틀던 기계가 아닙니다. 그건 인간이 사운드로 존재를 증명한 가장 직관적인 도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