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음악을 바꾼 기계들: 로파이(Lo-fi) 음악의 인기와 카세트 데크의 부활
안녕하세요. 음악을 사랑하는 Vibe입니다.
거칠고 느리고 불완전한 것이, 왜 이토록 위로가 되는가
우리는 이제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24비트 고음질 스트리밍, 노이즈 캔슬링, 깨끗한 믹스와 정교한 마스터링.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했는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거칠고, 노이즈 섞이고, 어딘가 빈틈이 있는 음악을 찾기 시작한 것이죠. 바로 ‘로파이(Lo-fi)’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단순한 음악적 취향을 넘어, 감정과 매체, 기술과 기억이 교차하는 문화적 흐름이 존재합니다. 특히, 카세트 테이프와 데크의 복귀는 단순한 레트로가 아닌, 로파이 사운드의 철학이 현실로 구현되는 물리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로파이 음악의 인기와 카세트 미디어의 부활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깊이 있게 살펴보려 합니다.
Lo-fi는 무엇인가?
Lo-fi, 즉 "Low Fidelity"란 말은 원래 음질이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80~90년대에는 라디오에서 잡음 섞인 녹음, VHS의 하이파이 오디오보다 떨어지는 음질 등을 일컫는 말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오늘날의 로파이는 일부러 그런 ‘불완전한 질감’을 추구합니다. 테이프 히스 노이즈, 빈티지 EQ, 낮은 샘플레이트, 디스토션, 흔들리는 피치... 이런 요소들은 오히려 "감정이 담긴 소리"로 받아들여집니다. 완벽하고 무결점인 디지털 사운드에 지친 이들에게, 로파이의 결함은 마치 사람의 숨결처럼 들리죠.
디지털 속에서 피어난 아날로그의 감성
2020년대를 살아가는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는 어릴 적 카세트, CD, 미니콤포의 사운드를 몸에 각인한 마지막 세대입니다. 그들에게 로파이 음악은 단지 스타일이 아니라, 기억과 연결된 감각의 재현입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lofi hiphop radio – beats to relax/study to] 스트리밍은 2020년대 인터넷 시대의 백색소음이자 감정의 피난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로파이 사운드의 정서적 중심에는 ‘아날로그 녹음기’의 감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카세트 데크와 테이프는 디지털 시대에 사라진 "소리의 물성"을 다시 불러오는 도구가 되었죠.
카세트 데크, 왜 다시 돌아왔나?
최근 몇 년 사이, 글로벌 음반 시장에서 카세트 테이프 앨범의 판매량이 다시 증가하고 있습니다. BTS, Billie Eilish, Taylor Swift 같은 글로벌 아티스트조차 한정판 카세트 에디션을 출시하고 있고, Bandcamp를 중심으로 인디 로파이 아티스트들은 카세트 테이프를 직접 복사해서 파는 경우가 늘고 있죠. 이런 흐름은 단순한 레트로 놀이가 아닙니다. 카세트 테이프는 ‘시간이 흐르는 매체’입니다. 되감고, 재생하고, 다시 플레이해야 하는 그 물리적 동작 속에서 사람들은 디지털 시대에 잃어버린 '음악과의 물리적 관계성'을 되찾고 있는 겁니다.
Lo-fi와 카세트가 만났을 때: 사운드 디자인
로파이 트랙에서는 종종 테이프 노이즈, 피치의 흔들림 (wow & flutter), 카세트 스톱 사운드, AM 라디오 EQ 등이 의도적으로 삽입됩니다. 이러한 사운드는 실제 카세트 데크를 사용하거나, 플러그인(VST)으로 구현되기도 하죠. (예: iZotope Vinyl, RC-20 Retro Color, Cassette by Wavesfactory) 결국 로파이는 단순히 ‘낡은 소리’가 아닙니다. 기술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의 구조이며,
그 중심에 카세트 테이프의 물리적 기억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RC-20 Retro Color: 감성을 디자인하는 디지털 이펙트
로파이 음악에서 테이프 질감과 빈티지한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많은 프로듀서들이 실제 카세트 데크 대신 디지털 플러그인을 사용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사용되는 도구 중 하나가 바로 RC-20 Retro Color입니다. 이 플러그인은 6가지 모듈을 통해 테이프 노이즈, 피치 흔들림, 저비트 디지털 감성, 테이프 스톱 효과 등을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게 해줍니다. 실제로 피아노 루프에 Wobble을 걸면 오래된 테이프처럼 음이 약간 흔들리고, 하이햇에 Noise를 섞으면 카세트 히스 사운드가 자연스럽게 입혀집니다. RC-20은 단순히 음질을 떨어뜨리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완벽하게 깨끗한 음악 속에 감정을 삽입하는 기계입니다. 프로듀서들은 이 플러그인을 통해 디지털로 만들어진 음악에 아날로그적인 불완전함을 심고, 거기서 나오는 따뜻한 이질감을 감정의 언어로 바꾸고 있는 것이죠.
대표 트랙 소개: jinsang – “Affection” (2016)
로파이 힙합 장르를 대표하는 아티스트 중 하나인 jinsang의 곡 “Affection”은 카세트 테이프의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낸 트랙 중 하나입니다. 짧은 피아노 루프, 의도적으로 저음질화된 드럼, 그리고 백그라운드에 깔린 아날로그 테이프 노이즈까지.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재생되는 음악을 엿듣는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로파이 음악은 ‘기억’의 소리입니다. 정확한 음정, 완벽한 믹스가 아닌,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감정의 흔적이죠.
로파이와 새로운 음악 소비 문화
로파이 음악은 듣는 방식도 독특합니다. 정식 앨범보다 유튜브, 사운드클라우드, Bandcamp 같은 플랫폼에서 플레이리스트형 콘텐츠로 소비되죠. “공부할 때 듣기 좋은 비트”, “밤새 듣는 로파이 재즈”, “비 오는 날 들을 로파이 피아노” 등 용도 중심으로 설계된 로파이 음악은, BGM이자 정서적 배경으로 기능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배경음에는 낡은 데크에서 들리던, 카세트 특유의 사운드 질감이 숨어 있죠.
완벽하지 않기에 더 오래 남는 음악
로파이 음악과 카세트 데크의 부활은 단순히 유행이 아니라 지친 청각의 회귀 운동입니다. 우리는 너무 정제된 음악에 지쳤고, 그 안에서 감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카세트의 노이즈, 로파이의 루프, 이 모든 것은 거칠고 불완전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인간적입니다.
기계가 감정을 잃어갈수록, 사람들은 ‘기억과 추억과 감정이 깃든 기계’를 다시 찾고 있습니다. 로파이는 그 소리를 담고 있고, 카세트는 그 감정을 재생하는 기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