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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음악을 바꾼 기계들: 소리를 디자인하다. 필터에 대하여

Valueinve 2025. 7. 10. 00:04

안녕하세요. 음악을 사랑하는 Vibe입니다.

 

 

음악이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

어느 날, 한 사람이 말했다. “왜 어떤 음악은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고, 어떤 음악은 그냥 지나가는 소음처럼 들릴까?” 그 질문은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답을 찾은 건 꽤 우연한 순간이었다. 한 DJ의 라이브 셋을 듣던 중, 그는 단 한 번의 손놀림으로 전자음의 흐름을 끊었다. 음악이 숨을 멈춘 듯한 찰나, 관객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그 다음 순간, 미세하게 잘라낸 소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향해 몸을 던졌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때 느꼈다. 이건 단순히 소리를 내는 기계가 아니라, 소리를 조각하는 기술이라는 걸. 그리고 그 중심에 ‘필터’라는 장치가 있었다.

‘필터’라는 단어는 흔히 일상에서는 물이나 공기를 걸러내는 정화장치로 쓰이지만, 음악에서는 조금 다르다. 필터는 소리에서 어떤 부분을 ‘의도적으로 지우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지우는 것이 어떻게 음악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필터를 통해 소리의 빈 공간을 느끼고, 오히려 더 큰 감정을 전달받는다. 마치 누군가 말하지 않은 문장 속에서 더 많은 의미를 상상하게 되듯이. 이 글에서는 바로 그 ‘필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작은 기술이 어떻게 음악의 감정을 바꾸고, 사운드 디자인의 문법을 다시 쓰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필터가 ‘음악을 바꾼 기계’ 중 하나로 불릴 수밖에 없는지.

 

 

필터는 ‘무엇을 없앨 것인가’를 결정하는 철학이다

필터의 기본 원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소리는 진동이고, 진동은 주파수로 표현된다. 필터는 그 주파수 중 일부를 없애는 기술이다. Low-pass filter는 낮은 주파수만 남기고 높은 주파수를 잘라낸다. 반대로 High-pass filter는 높은 것만 남긴다. 이 외에도 특정 대역만 강조하거나 제거하는 Band-passNotch 필터 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기술적인 명칭이 아니다. 핵심은 무엇을 없애느냐가 곧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누군가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단어를 쓰지 않느냐가 오히려 감정을 더 크게 만든다. “사랑해”라는 말 대신 “기다릴게”라는 말이 더 강한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것처럼. 필터는 소리에서도 같은 역할을 한다. 어떤 소리를 제거했는지가 곧 음악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그래서 필터는 단순히 기술적인 장치가 아니라, 음악가의 ‘감정 조율기’라고 불릴 수 있다.

 

 

아날로그 필터가 만든 ‘공기의 떨림’

1970년대, 신시사이저가 막 대중화되던 시기였다. Moog, ARP, Korg 같은 회사들이 내놓은 아날로그 신스는 소리를 만드는 새로운 도구였다. 그런데 이 신시사이저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는 ‘필터’였다. Moog Ladder Filter는 그 대표적인 예다. 따뜻하면서도 둥글고, 고역대가 정리된 소리는 전자음악의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사람의 목소리처럼 공기를 통과한 느낌을 주었다. 재미있는 건, 이 아날로그 필터들은 사실 정확하지 않았다. 잡음도 많고, 똑같은 세팅을 해도 기기마다 소리가 달랐다. 그런데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만들어냈다. 마치 턴테이블의 바늘이 만든 작은 잡음이 음악을 더 실감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당시의 음악가들은 필터를 단순히 효과 장치로 쓰지 않았다. 감정의 선을 그리는 붓처럼 사용했다. David Bowie, Kraftwerk, Aphex Twin 같은 아티스트들이 신스 사운드에 필터를 입혀 전혀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필터는 ‘음악적 호흡’을 만들어낸다

클럽 음악을 생각해보자. 디제이가 음악을 틀고, 리듬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베이스가 사라진다. 그 순간 관객들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춘다. 필터는 그 숨을 빼앗고, 다시 베이스를 밀어넣으며 관객의 몸을 튕겨낸다. 이건 단순히 소리를 없앴다 넣는 트릭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호흡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이, 필터는 음악의 흐름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이런 식의 필터 활용은 하우스, 테크노, 드럼앤베이스 같은 장르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프렌치 하우스에서는 로우패스 필터로 디스코 샘플의 고음을 줄이고, 그 다음 순간 다시 열어주는 기법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Daft Punk의 음악을 떠올려보면 정확히 그 감정선을 기억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 필터는 더 정교해졌지만… 감정은 남았을까?

2000년대 이후, 음악 제작은 DAW(Digital Audio Workstation) 중심으로 바뀌었다. Ableton Live, Logic Pro, FL Studio 같은 프로그램은 엄청난 정밀도의 디지털 필터를 제공한다. 이제는 단순한 LPF, HPF를 넘어서 수백 가지 커브를 그릴 수 있다. 심지어 오토메이션으로 시간에 따라 필터를 자동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여전히 아날로그 필터 플러그인을 찾는다. 실제로 소리를 왜곡하는 불완전한 플러그인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왜일까? 그건 필터가 단순히 소리를 정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만들어내는 장치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계산이 아니다. 살짝 빗나간 음, 의도적인 왜곡,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에서 더 강하게 느껴진다.

 

 

AI와 필터의 미래: 감정을 읽는 기술

이제 음악도 AI가 만든다. 하지만 아직 AI는 사람처럼 감정을 담은 필터링을 못한다. 주파수 커브는 잘 그리지만, 그 커브 안에 ‘왜’가 없다. 하지만 흥미로운 시도가 나오고 있다. 일부 AI 알고리즘은 청취자의 반응을 분석해서 필터의 움직임을 자동 조정한다. 사람의 감정선에 따라 음악의 호흡을 맞추는 기술. 아마 앞으로는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AI가 만든 음악이 사람의 표정을 보고, 갑자기 로우패스를 걸고, 다시 열어주면서 “이 타이밍이죠?” 하고 묻는 세상. 기술은 점점 똑똑해지지만, 음악에서 필터가 가진 철학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야 한다. 어떤 소리를 지우고, 무엇을 남길지를 결정하는 건 결국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의 직관이기 때문이다.

 

 

필터는 음악의 쉼표다

음악은 단지 음을 쌓는 게 아니다. 음악은 그 사이를 어떻게 비워내느냐에서 감동이 나온다. 필터는 바로 그 ‘비워냄’을 디자인하는 도구다. 어떤 음악가는 필터로 분위기를 만들고, 어떤 DJ는 관객의 심장을 조종한다. 어떤 신스 장인은 필터 하나로 3분짜리 감정선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필터는 그냥 기술이 아니다.
필터는 음악 속 쉼표이며, 이야기의 여백이고, 감정의 여운이다.
그리고 그 여백 속에서, 사람들은 진짜 이야기를 듣는다.

 

 

필터를 사용한 대표적인 곡: Daft Punk – "One More Time" (2000)

사용된 필터: Low-Pass Filter

설명: 이 곡은 프렌치 하우스 사운드의 정수다. 로우패스 필터로 디스코 샘플의 고역대를 부드럽게 깎아내고, 다시 필터를 천천히 열면서 '차오르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Daft Punk 특유의 감성은 필터링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